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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의 고찰 미황사와 대흥사

땅끝에서 우뚝 솟은 천년의 숨결


<사진> 달마산 어깻죽지에 아슬아슬 달려 있는 도솔암. 20여 명이 서면 발 디딜 틈도 없다.

해남은 땅끝이다. 한반도 등뼈가 마지막으로 불끈 솟은 이곳에 달마산 미황사와 두륜산 대흥사가 자리했다. 천년 숲길을 걸어야 다가갈 수 있는 절집들이다.
해남은 기개가 높은 이들을 배출했다. 선비들의 단골 유배지였으며, 쟁쟁한 시인들을 다수 낳은 곳이 바로 해남이다.

김화성 여행 전문 작가

해남 달마산(489m)은 한반도의 화강암 꼬리뼈다. 하얀 바윗돌들이 우뚝우뚝 우렁우렁하다. 땅끝에 솟은 ‘작은 금강산’이다. 해남은 한반도의 등뼈가 마지막으로 불끈 치솟아 멍울진 땅. 그곳에서 달마산은 남해와 나란히 칼금을 내며 등줄기를 뻗고 있다.

달마산을 한 바퀴 돌아보려면 적어도 3시간쯤 잡아야 한다(송촌마을~송촌저수지~수정골~임도~관음봉~작은 바람재~미황사). 산 잔등에 오르면 한쪽에는 해남 벌판이 정갈하게 누워 있고, 또 한쪽에선 남해가 자글자글 끓고 있다. 손에 잡힐 듯 올망졸망한 섬들이 점점이 횡대로 떠 있다.

어룡도, 백일도, 흑일도, 당일도, 장구도, 보길도, 노화도…. 검정 선(線)과 파랑 조각의 ‘몬드리안의 바다(이흔복 시인)’가 조각보처럼 펼쳐진다.

땅끝은 바다의 끝이자, 땅의 시작이다. ‘끝의 끝은 다시 시작(오세영 시인)’인 것이다. 땅과 바다가 그어놓은 ‘출렁 금’이다. 그곳에 가면 누구나 가슴이 울렁인다. 어찔어찔 머리가 어지럽다. 발바닥이 간질간질, 귓속이 우렁우렁 젖어온다.

요즘 땅끝에 가면 새물내가 난다. 갓 빨래한 새 옷 냄새가 새록새록 우러난다. 파릇파릇 봄기운이 천지에 가득하다. 동백꽃이 피를 토하듯 통째로 땅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다. 땅끝 전망대에서 좌우 해안 따라 이어진 77번 도로는 이미 봄처녀에 홀려 나른하게 맥이 풀렸다. 마늘밭은 초록으로 가득하다.

보리밭도 검푸르다. 아지랑이 떼들은 해남읍내 벌판 논두렁에서 꼼지락거린다.

해남 땅은 온통 붉은 황토다. 고구마가 꿀맛이다. 고구마막걸리도 맛있다. 겨울엔 보리밭과 마늘밭을 채운 가녀린 연초록 싹들이 그 붉은 황토밭에 굳게 뿌리를 박고 견딘다. 칼칼한 바닷바람에 이를 앙다물고 맞선다. 바닷바람은 겨우내 아기보리, 아기배추, 아기마늘을 ‘검푸른 억센 풀’로 단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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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번 해안도로를 따라 강진 쪽으로 걷다 보면 전복, 김, 파래 양식장이 햇살에 자글자글 빛난다. 통통배 어부들의 손놀림이 부산하다. 해안 등성이 마늘밭 농부들은 황토 땅에 코를 박고 호미질에 바쁘다.

천년고찰 미황사는 단정하다. 반듯하면서도 소박하다. 달마산 앞가슴 반공중에 걸려 있다. 그림 같다. 그냥 보자마자 스르르 ‘절하고 싶고, 무릎 꿇어 입 맞추고 싶다(고정희 시인)’. 미황사 대웅전 앞마당에서 저물녘 곱게 물든 바다를 보면 마음이 둥글어진다.

새벽 도량석 목탁소리가 목관악기 음질처럼 따뜻하다. 도솔암은 달마산 어깻죽지에 아슬아슬하게 달려 있다. 한 평 남짓이나 될까. 20여 명이 서면 발 디딜 틈도 없다. 용케도 기암괴석 두 바위 틈에 암자를 지었다. 고려시대에 지은 것이다. 달고 시원한 샘물도 솟는다. 미황사에서 걸어서 1시간쯤 걸린다. 천년 숲길을 따라 가다가 표지판을 보고 오르면 닿는다.

도솔암에서 달마산 정상까지는 2시간은 잡아야 한다. 온통 바윗길 능선길이다. 크고 작은 돌들 우두둑 지르밟고 가야 한다. 수시로 밧줄을 잡고 오르내린다. 산 아래 오른쪽은 바다, 왼쪽은 들판이다.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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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천년고찰 미황사는 단정하다. 반듯하면서도 소박하다. 달마산 앞가슴 반공중에 걸려있다.

두륜산 대흥사는 아늑하다. 대흥사 주차장에서 대웅전에 이른 길은 ‘오래된 숲길’이다. 이른바 ‘아홉 숲’에 ‘긴 봄’이라는 ‘구림장춘(九林長春)’이다. 4㎞에 가까운 십리길. 늙은 나무들이 아치형으로 나무 터널을 이룬다. 여름이면 햇볕이 거의 들지 않을 정도다. 두륜산(706m)은 대흥사를 품 안에 안고 있다.

매표소~장춘동~대흥사~삼거리~북미륵암~천년수~만일재~두륜봉~진불암~물텅거리골~표충사~대흥사 코스는 천천히 걸어도 4, 5시간이면 충분하다.

두륜산은 영락없이 ‘누워 있는 부처님 형상’이다. 선이 낮고 부드럽다. 일지암은 부처님 머리 바로 아래에 목침처럼 자리 잡고 있다. 일지암은 초의선사(1786~1866)가 1824년 서른여덟 때 손수 짓고 42년 동안 머물렀던 암자이다. 초의가 동갑내기 추사를 만난 것은 1815년, 그의 나이 스물아홉 때였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 시절(1840~1848)엔 다섯 번이나 그를 찾아가 위로했다. 초의와 추사는 각별했다. 어릴 적 동무처럼 서로 허물이 없었다.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금세 느낄 수 있다.

‘이 백수 늙은이가 가소롭게도 한때 절연할 생각까지 품었음을 고백하네. 나는 스님은 물론 스님의 글까지도 보고 싶지 않네. 다만 차와의 인연을 끊어버릴 수 없으니… 두 해나 쌓인 체납세를 보내시게.’

초의는 1809년 그가 스물넷일 때 다산을 만나 그로부터 주역과 시문을 배웠다. 다산은 스물넷이나 아래인 추사 김정희(1786~1856), 초의선사와 허심탄회하게 학문을 논했다. 일지암에서 차를 마시기도 하고, 가끔 이들과 외가인 녹우당에 들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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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해남윤씨가 터를 잡은 해남 연동의 녹우당. 윤선도, 윤두서, 윤용 등의 빼어난 문인과 화가를 낳은 곳이다.

대흥사는 명필의 전시장

추사는 1840년 제주 유배 길에 대흥사의 초의를 찾았다. 추사가 물었다. “저 ‘大雄寶殿(대웅보전)’ 현판 글씨는 누가 썼는가?” 초의가 대답했다. “원교 이광사(1705~1777)일세.” 추사는 “쯧쯧, 글씨를 좀 안다는 자네가 어떻게 저런…”이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초의에게 ‘无量壽閣(무량수각)’이라는 현판 글씨를 써줬다. 초의는 곧 이광사의 글씨를 떼어내고 추사의 글씨를 달았다. 추사는 1840년 9월 27일 바로 해남 이진(梨津)에서 배를 타고 제주 유배 길에 올랐다.

1848년 12월 추사의 귀양살이가 풀려 다시 대흥사를 찾았다. 추사가 초의에게 물었다. “저번 원교 이광사의 글씨는 어디 있는가?” 초의가 대답했다. “창고에 보관해두었네.” 추사가 말했다. “내 글씨를 떼어내고 그의 글씨를 다시 달아주게. 내가 그때는 잘못 보았네.” 8년여의 귀양살이가 그 도도하고 자존심 강한 추사를 부드럽고 넉넉한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현재 대흥사 ‘대웅보전(大雄寶殿)’에는 원교 이광사의 현판이 걸려 있고, 그 왼쪽 승방에는 추사의 ‘무량수각(无量壽閣)’ 현판이 걸려 있다. ‘千佛殿(천불전)’ ‘枕溪樓(침계루)’도 이광사의 글씨다. 또 있다. 추사 당대 3대 명필 중 하나인 창암 이삼만(1770~1845)의 ‘駕虛樓(가허루)’ 글씨도 있다. 정조대왕이 쓴 ‘表忠祠(표충사)’ 편액도 빼놓을 수 없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말한다. “원교의 글씨는 획이 가늘고 빳빳하여 화강암의 골기(骨氣)가 느껴진다. 손칼국수의 국숫발 같다. 추사의 글씨는 획이 살지고 윤기가 난다. 탕수육이나 란자완스를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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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아늑한 절, 두륜산 대흥사. ‘대웅보전’ 현판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600년 명문가 해남윤씨

명문가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남윤씨가 현재 해남 연동의 녹우당에 터를 잡은 것은 어초은(漁樵隱) 윤효정(1476~1543)부터다. 그가 바로 해남윤씨 어초은파 시조다. 어초은은 ‘고기나 잡고 땔나무나 하면서 숨어 살겠다’는 뜻이다. 어초은이 강진에서 이곳으로 올 당시는 연산군 재위의 무오사화(1498), 갑자사화(1504)로 선비들이 떼죽음을 당하던 때다.

어초은은 은거했지만 그의 후손들은 쭉쭉 뻗어났다. 고산 윤선도(1587~1671)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고, 공재 윤두서(1668~1715), 낙서 윤덕희(1685~1766), 청고 윤용(1708~1740) 등 3대에 걸쳐 빼어난 문인화가를 낳았다.

윤선도는 남인이었다. 남인은 1694년(숙종 20년) 장희빈 관련 갑술옥사를 계기로 송시열의 서인들에게 정권을 완전히 내주게 된다. 자연히 윤선도의 후손들도 관직에 나갈 수 없었다. 1712년 윤선도의 증손자 윤두서가 아예 서울 집을 정리하고 해남 녹우당에 정착해 그림과 글씨로 세월을 낚았던 이유다.

녹우당엔 책과 문서 그림 등 2500여 점이 전해 내려온다. 대대로 쌓여왔던 조선 선비들의 지식 정보가 그 속에 다 들어 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500여 권의 책을 쓸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외가인 녹우당의 자료를 적잖이 활용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다산의 어머니는 윤두서 아들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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