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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호 > COVER STORY

COVER STORY / 제18대 대통령 취임

취임사를 통해 본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 철학과 대북정책
열려라! ‘행복한 통일시대’
<성기영 연세대학교 북한연구원 연구교수>

2월 25일 임기를 시작한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사 키워드는 ‘국민행복’이었다. 이는 북한, 통일 및 외교·안보정책과 관련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사를 통해 던진 통일과 관련한 화두가 바로 ‘행복한 통일시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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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통일시대’는 지난 2월 22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발표한 5대 국정과제의 하나로 이미 제시된 바 있다. 7000만 한민족의 간절한 염원인 동시에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로서 ‘통일’이 대통령 국정과제의 하나로 제시된 것은 그 자체로서도 의미가 적지 않다.

시계를 5년 전으로 돌려보자. 이명박 정부는 5대 국정지표의 하나로 ‘글로벌 코리아’라는 슬로건을 앞세웠다. 북핵 문제를 포함한 대북정책 관련 공약이 ‘글로벌 코리아’의 하위 국정과제로 제시된 것이다. 그러나 ‘글로벌 코리아’에는 국방 개혁이나 자원·에너지외교 같은 외교·안보 과제들뿐만 아니라 기후변화 대책, 디자인 코리아 프로젝트, 심지어 친환경 대운하 건설과 같은 과제들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반도 문제의 국제화 또는 글로벌화라는 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통일과 관련한 대국민 약속을 다시 국정과제로 격상시키면서 ‘행복한’ 통일이라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사실 취임사에서 던진 화두만으로 ‘행복한 통일’이 어떠한 미래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인지 당장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박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 기간에 제시했던 통일 관련 공약과 인수위가 내놓은 국정과제를 중심으로 이를 유추해보는 것은 가능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통일 관련 공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했던 표현은 ‘작은 통일’로부터 ‘큰 통일’을 지향한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15일 ‘신뢰 외교와 새로운 한반도’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외교·안보 분야 공약에서 이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한 바 있다. 이를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면 이렇다. 먼저 통일의 경로와 관련해서는 실질적 평화를 기초로 군사대결을 완화하고 경제공동체를 건설한 후 궁극적으로 정치적 통합에 나선다는 것이다. 또한 통일의 방법과 관련해서는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계승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군사대결 완화 → 경제공동체 건설 → 정치적 통합

경제공동체를 강조하는 이유는 통일의 혜택이 남북한 국민들 모두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에서일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남북한 간 녹색 경제협력이나 비무장지대(DMZ) 공동 조사연구를 통해 환경공동체를 건설하는 방안들도 제시되고 있다. 이렇게 경제 및 환경공동체를 통일로 나아가는 초석으로 설정함으로써 통일을 우리 경제와 삶의 질을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에서 함께 성취될 수 있는 ‘즐거운 숙제’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행복한 통일’을 준비하고 실현해나가기 위해 제시된 과제들 중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준비된’ 통일이다. 이를 위해 탈북민들에 대해 교육과 의료 지원을 강화하고 통일에 대한 공감대 확산을 위해 주변국과 해외동포들을 상대로 하는 외교 및 지원활동을 강화한다는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준비된’ 통일을 이야기할 때 이러한 문제들보다 훨씬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문제는 다름 아닌 ‘돈’이다. 이명박 정부 후반기부터 통일항아리 사업 등을 통해 통일재원 마련사업을 꾸준히 벌여왔다. 이명박 정부는 한 걸음 나아가 남북협력기금 내에서 별도로 통일계정을 설치하는 기금법 개정안을 만들어 지난해 8월 국무회의에서 통과시킨 바 있다. 그런데 당초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 관련 공약에서는 이 문제에 관해 언급된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인수위 국정과제 발표를 통해 통일재원 마련 법제화를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힘으로써 다시 한 번 관심을 모으고 있다. 특히 통일재원과 관련한 논의가 이명박 정부 시절 북한 급변사태의 결과를 전망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photo<사진>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전인 1월 16일, 대북정책 논의를 위해 방한한 미 대표단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커트 캠벨 차관보, 박 대통령, 성김 주한미국대사, 마크 리퍼트 미 국방부 아태차관보, 다니엘 러셀 백악관 NSC 아시아담당 선임 보좌관, 제임스 줌왈트 미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

통일로 가는 첫 단계는 남북 간 신뢰 회복

‘작은 통일’에서 ‘큰 통일’로, 그리고 구체적 준비를 통한 실질적 통일로 가는 첫 단계는 남북 간 신뢰의 회복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 인생을 상징하는 키워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신뢰’는 남북관계에서도 첫 번째로 꼽히는 덕목이다. 남북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박 대통령이 내세웠던 과제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라는 이름으로 더욱 친숙하게 불리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내세운 신뢰의 중요성은 남북관계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가 내세운 ‘행복한 통일시대의 기반 구축’이라는 국정목표 중 통일 관련 국정과제와 함께 제시된 외교 분야 국정과제 역시 ‘신뢰외교’라 이름 붙여져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언급한 우리 외교의 비전은 비교적 간단하다. 아시아에서 긴장과 갈등을 완화하고 평화와 협력이 더욱 확산될 수 있도록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및 아시아 대양주 국가들과 신뢰를 돈독히 쌓겠다는 것이다. 취임사의 내용으로만 보면 무척 단순해 보이지만 한반도가 처해 있는 엄중한 대외 환경에 비춰보면 신뢰외교가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하다.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Rebalancing) 선언, 중국 제5세대 지도부의 등장, 일본 아베 정권의 우경화 움직임, 그리고 러시아의 극동 진출 강화 흐름까지 한반도 주변 정세는 중첩된 불확실성 속에서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격동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선거 기간이던 2012년 8월 외신기자 클럽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신정부의 외교 구상에 대해 포괄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당시 연설의 제목은 ‘전환기의 대한민국 : 평화와 협력의 뉴프론티어’였다. 당시 박 대통령은 ‘서울 프로세스’와 ‘아시아 협력벨트’ 등 새로운 구상을 내세워 한국이 지역 및 글로벌 협력의 허브가 되겠다는 외교 전략을 구체화했다. ‘서울 프로세스’는 한반도 주변 이해관계국들과 더불어 신뢰 구축, 협력 안보, 인간 안보 등을 추구하겠다는 것이고 ‘아시아 협력벨트’는 기존의 동아시아~태평양의 횡적 연결축을 보완해 동남아~유라시아까지 포괄하는 종적 연결축을 완성하겠다는 발상이다.

그러나 북한 3차 핵실험 이후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북핵 위기와 해결 기미를 찾지 못하는 중일 영토분쟁 등 동북아 지역의 긴급한 현안들 때문에 박근혜 외교는 이러한 ‘그랜드 비전’을 구체화하기도 전에 이미 커다란 도전에 직면해 있는 게 현실이다.

박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북한을 향해 핵 포기 결단을 다시 한 번 촉구했다. 북한의 핵실험은 민족의 생존과 미래에 대한 도전이며 최대 피해자는 바로 북한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북한의 핵실험 강행 직후 당선인 자격으로 내놓았던 ‘북핵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발언과 연장선상에 있다. 유엔을 통한 제재나 한미일 협의를 통한 별도 제재 등은 취임사에서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취임사를 통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다시 한 번 강조함으로써 이를 행복한 통일시대의 기반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차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북한이 3차 핵실험을 강행함으로써 박근혜 대통령의 외교·안보·통일 분야 3가지 국정목표(‘튼튼한 안보’, ‘행복한 통일’, ‘신뢰외교’) 중 ‘행복한 통일’보다는 ‘튼튼한 안보’ 쪽에 방점이 놓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국정과제 발표를 통해 보더라도 단기적으로 억지와 안보가 강조되고 남북관계 정상화와 지속 가능한 한반도 평화는 중·장기 과제로 배치되었다. 따라서 개성공단 국제화, 서울·평양 남북교류협력사무소 설치와 같은 굵직굵직한 공약들이 추진될 수 있는 여건은 핵 문제의 진전과 연동될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이러한 인식과 정황을 반영하듯 대선 당시 ‘외교·통일’ 공약으로 분류돼 있던 북핵 관련 이슈들은 국정과제 발표에서 ‘안보’ 분야 추진 과제에 포함되었다.

photo<사진>2월 22일 취임을 앞둔 박근혜 대통령이 서울 용산구 합동참모본부를 방문했다. 박 대통령은 25일 0시 핫라인을 통해 정승조 합참의장에게 전화를 걸어 대북 감시·경계태세를 점검하는 것으로 임기를 시작했다.

민간 채널로 ‘실현 가능한 협력’ 먼저 추진했으면

불과 3개월 전만 해도 박근혜 정부의 대북·통일정책에 대한 희망적 관측이 주류를 형성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과 이명박 정부 5년에 걸쳐 서로 상반된 방식으로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했지만 핵 문제만 놓고 본다면 목표 달성에 실패한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제3의 대안을 제시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3개월 만에 이런 기대감은 크게 줄어들었다. 대신 핵 무장론부터 전술핵 재배치론, 선제타격론 등과 같은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다. 자칫하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출범할 모멘텀조차 찾기 힘들어질지 모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박근혜 정부는 핵실험에 대한 제재 조치를 시행함과 동시에 신뢰 구축에 필요한 몇 가지 조치들을 준비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대북정책 공약들 중 실현 가능한 기능적 협력 방안, 예를 들면 녹색 경제협력이나 DMZ 생태 조사 같은 것들을 추려 정부가 아닌 민간 채널을 통해 대북 접촉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나타난 국정목표와 과제들 중 외교·안보 및 대북·통일정책이 갖는 중요성을 높이고 이를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다. ‘북핵’ 문제에 대한 단기적 대응뿐만 아니라 중·장기적으로 ‘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적 상상력은 최소한 이런 기반 위에서만 잉태될 것이다.

photo<사진>박 대통령이 2월 25일 국립서울현충원 방명록에 남긴 3대 국정지표


성기영 = 영국 워릭대 국제정치학박사와 미국 남가주대 박사후연구원을 역임하고, 현재 연세대학교 북한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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